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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북매일 -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보인다 - (1) 정몽주의 무리이니 경상도 장기현 유배를 명하노라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19-07-09

기사링크 :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9482

 

장기고을과 유배문화
1. 충신이 역적으로 몰린 여말선초의 설장수(偰長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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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읍내 전경. 겉으로 보기에 장기는 한적한 시골마을 같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무수한 관리들이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머물다간 역사의 땅이다. /이상준 제공

조선조 맨 처음 포항 장기로 유배를 온 설장수(偰長壽)는 위구르족(Uighur)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다.

원나라에서는 위구르를 고창(高昌)이라고 불렀는데, 설장수의 아버지인 설손(偰遜)은 고창 설(偰)씨의 후손이다. 원나라에서 중앙관료로 활동하였던 사람들 중에는 고창 설씨 가문이 막강했다. 이는 시조가 칭기스칸에 협조한 공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이 유학을 수용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시조인 위에린테무르(岳璘帖穆爾)는 무신이었지만 자식들에게 논어·맹자·사서 등을 공부시켰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줄줄이 나왔을 뿐 아니라 설손의 3대 조부는 원사(元史) 열전 중 충의(忠義)편에 기록될 정도로 뼈대 있는 가문이 되었다.

설손은 원나라 황실 교육기관인 단본당(端本堂)에서 황태자에게 경전교육을 담당했다. 이 때 고려 충숙왕 둘째 아들인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공민왕)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로 왕자를 원나라에 보내 일정기간 머물게 하고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빠이앤티무르는 원 왕실에 숙위로 와 있는 신분이었으나 설손과 가깝게 지냈다.

원나라는 순제(順帝) 치세로 내려오면서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설손은 이제 원나라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과거 공민왕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 살길을 찾아 나선 망명이었다. 이때가 공민왕 8년(1359) 12월, 설장수의 나이 18세 때였다.

반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은 옛 친구이자 망명객인 설손에게 극진한 예우를 했다. 그에게 고창백(高昌伯)이라는 칭호는 물론이고 전답과 살 집을 마련해 줬다. 이로써 위구르 최고 명문가이던 고창 설씨의 종가(宗家)가 중국에서 고려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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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인들이 심문을 받으러 갈 때 주로 호송용으로 사용되던 함거.

고려로 온 설손은 이듬해인 1360년에 설장수 5형제를 남기고 죽었다. 공민왕은 다섯 아들 중 맏이였던 설장수를 특히 아꼈다. 부친의 상중이었음에도 설장수가 과거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1362년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설장수를 포함한 총 33명이 합격했다. 합격자 중에는 조선 개국의 기초를 연 정도전(鄭道傳)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도전과 설장수는 과거시험 동기라는 인연으로 친하게 된다.

한편, 설장수의 삼촌이었던 설사(偰斯)는 원나라가 망하자 1367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게 귀부(歸附)하였다. 이후 설사는 공민왕 18년(1369년) 4월과 19년(1370년) 5월 각각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그는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봉한다는 주원장의 임명장과 옥새를 갖고 와 고려왕에 대한 책봉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공민왕은 명나라 조정 유력자를 숙부로 둔 설장수를 명나라에 보내 외교문서와 선물을 전달했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인맥까지 갖춘 설장수가 원·명 교체기에 중국전문 외교관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되고 친원정책을 추진하던 이인임(李仁任)이 정권을 장악하자 설장수의 외교활동에도 검은 구름이 깔렸다. 이인임 일파는 우왕을 추대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18년 만에 다시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이인임 정권의 친원정책은 고려 개혁소장파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불러 왔다. 하지만 정도전·정몽주·이숭인·김구용·권근 등 개혁소장파들은 고려를 방문한 북원의 사신을 영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가 오히려 유배를 가게 되었다.

개혁소장파와 뜻을 같이 했던 설장수도 중앙관계에서 밀려나 원주 목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으로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반원파인 정몽주·김구용·박의중·이숭인·박상충·하륜· 정도전 등과는 자주 교류하면서 고려왕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고려후기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계열의 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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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주요 유배길은 삼남대로, 영남대로, 관동대로가 있었다. 삼남대로는 서울에서 충청·전라·경상도 방향으로 가는 길로, 조선 초 한양 도성에서 남대문을 지나 삼남지방으로 가는 간선도로의 하나였다. 영일과 장기 등은 한양-남태령-안성(죽산)-충주-문경-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영일·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 길을 이용했다. 관동대로는 대관령을 넘어 동해안쪽으로 연결된다.

1391년 설장수는 왕세자 석(奭)이 명나라 황제를 조현(朝見)하러 갈 때 사신으로 갔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친한 친구였던 설장수와 정도전이 결국 숙적(宿敵)으로 갈라서는 원인이 됐다. 이들의 우정이 지속되었던 마지막 시점은 대략 1391년 9월까지였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 등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린 적이 있었다. 1391년에 와서 공양왕 옹립에 공을 세웠던 9명의 관료들이 ‘정난 9공신’으로 책봉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정도전·정몽주·설장수 등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정란 9공신 동료였다. 그러나 정난공신으로 일시적 정권을 장악한 정몽주는 급진 개혁파인 이성계와 정도전을 정계에서 축출해버렸다. 그 무렵에 공양왕의 왕세자 석(奭)을 명나라에 조현(朝見)이라는 명목으로 보내면서 설장수를 특사로 딸려 보낸 것이다.

세자의 명나라 조현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각각 정계에서 축출됨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일이었다. 이 시기는 이성계 및 정도전 등 조선 개국세력과의 노선이 구분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설장수의 외교적 성공은 곧 세자 및 공양왕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기여하는 행동이었으므로 이성계·정도전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었다. 설장수의 이런 외교적 행위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보다는 기존의 고려왕조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입장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이 일로 설장수는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찍히게 되었고, 역성혁명의 대열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었다.

이러던 차에 정도전 등과 끝까지 대립했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을 당해버렸다. 고려 왕조의 유지를 바랬던 설장수의 정치적 운명도 이때 바뀌게 되었다. 곧 그에게도 화가 미쳤다. 정도전으로부터 이색과 함께 정몽주의 당이라는 탄핵을 받았다.

1392년 7월 30일,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 즉위교서 반포 직후 설장수를 장기로 유배 보내버렸다. 이색·정몽주·우현보 등과 함께 도당(徒黨)을 지어 내란을 음모하였다는 혐의였으나, 이는 정도전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실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민개(閔開)를 사주하여 정몽주와 설장수를 탄핵토록 하였다. 민개는 탄핵문에서 설장수가 ‘간교하고 절조가 없는 자로 그저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데도 잘못 등용되어 경상(卿相)의 지위까지 올랐다’고 비판했다.

장기에 온 설장수는 6개월만인 1393년 1월, 이성계의 부름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을 떠나갔다. 유배에서는 풀렸지만 이후 그는 정도전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도전과는 생각이 달랐다. 설장수의 외교적 능력과 가치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신왕조의 개창 초기 대명외교관계를 안정시킬 탁월한 외교관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성계의 집권 이후 대명관계는 파란이 계속되었다. 1394년(태조 3) 명의 주원장은 표전문(表箋問)사건을 일으켜 정도전이 이 문서를 작성한 주범이라고 하면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였다. 표전문은 핑계였고, 정도전이 추진하는 요동정벌론 등이 여러 가지로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국에 이성계는 정도전의 견제를 물리치고 설장수를 유배지에서 불러내어 새로 설립한 외교기구인 사역원의 제조(수장) 자리를 맡겼다. 이때 설장수는 조선 500년간 이어진 사역원 운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역관 선발시험을 새롭게 개편하고, 역관들에게 외교실무 수행에 필요한 유교적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교육을 이수토록 하였다. 그는 특히 역관들의 학문적, 인성적 기초로서 ‘소학’(小學)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이를 중국어로 풀어 쓴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직접 저술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역학교재로 오랫동안 사용된 명저였다.

이런 설장수에게 이성계는 1396년(태조 5) 계림(鷄林,경주)을 관향(貫鄕)으로 삼도록 사성(賜姓)하였다. 이래서 설장수는 경주 설씨의 실질적인 시조(始祖)가 되었다.

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태조에 이어 정종이 즉위하자 설장수는 그해 9월에 세자 책봉사절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의 양위를 고하였다. 명으로 가는 도중에 명 태조 주원장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진향사(進香使)로 임무를 변경하여 외교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동안 그는 8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것이 마지막 외교임무였다. 1399년 6월에 귀국한 설장수는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1월 16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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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의 시가 걸려 있었던 의운정 터 부근. 의운정은 현재 포항 대송면 남성2리 정몽주의 시조 습명(襲明) 공의 단소(壇所)가 있는 언덕 부근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의운정은 조선조 중엽에 없어졌다.

정종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내려 주었으며,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주고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렸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며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고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운재집(芸齋集)’이 있다. 글씨도 ‘목은집(牧隱集)’에서 볼 수 있듯이 필법이 굳세고 힘차며 법도가 있다.

설장수는 여말선초와 원명교체기라는 한반도와 중원의 역사 격변기에 8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훌륭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민족의 외교사에서 위구르 출신 이방인이 정치적 난민으로 귀화하여 이처럼 큰 족적을 남긴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이는 우리 민족 외교의 다문화성과 포용성, 개방성을 상징하는 큰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장기에서 6개월이라는 짧은 유배기간을 보냈지만, 유배기간 내내 그의 깊이 있는 유교적 식견과 사상은 장기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문에서 꼭 해야 할 일이며, 실력을 쌓아놓으면 죽음의 문턱에서도 살아 날 방도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완이 없었더라면 이성계가 그를 다시는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장기에서 지은 시가 영일객관(迎日客館)의 북쪽 의운정(倚雲亭)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이 ‘영일읍지’(1832)와 ‘조선환여승람’(1938) 등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시에는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배객의 심정이 절절이 녹아있다.

의운정(倚雲亭)

설장수(偰長壽)

山肴海錯托珍羞
산나물 바닷고기 진수성찬 벌여놓고

野榼村醪慰久留
들바가지 촌막걸리 오랜 무료 위로하네

半夜窮愁侵客夢
한밤중 시름겨워 나그네 꿈 잠기는데

一襟爽氣在譙樓
한줄기 상쾌한 바람이 문루를 스치누나

興來落筆詩篇重
흥이 일면 붓을 놓고 시편 거듭 읊으며

老去傷情涕泗流
늙어가는 시름에 눈물자주 흘리네

昭雪此寃終有望
이 설움 씻을 희망 끝내는 있으련만

皇天還肯濟吾不
하늘은 나를 알고 구제해 주실런지

/이상준(향토사학자)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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