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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북매일 -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보인다 - (2) 토사구팽 된 외척과 공신(功臣)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19-07-09

기사링크 :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20201


이상준의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보인다
2.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 이무(李茂)의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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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신창리 일출. 장기일출은 조선십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워 유배객들의 시나 선비들의 문집에도 자주 등장한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1409년 10월 초순경,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공신(功臣)의 아들 한명이 포항 장기로 유배를 왔다. 10월 2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던 날만 해도 그게 어느 쪽에 붙어있는 땅인지도 몰랐다. 한양에서 말을 타고 영남대로를 따라 9일 반이 걸려 도착한 바닷가 고을은 한없이 빈한해 보였다. 살아갈 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이라는 중앙 관리였지만 지금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승조(李承祚)였다. 바로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우의정이었던 이무(李茂)의 둘째아들이다.

이승조가 장기로 유배 온 사연은 우선 태종의 정비(靜妃) 원경왕후 민씨, 제1·2차 왕자의 난, 민무구·무질의 옥사(獄事),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이무의 옥사에 대한 내막을 알아야 풀린다. 옥사란 반역, 살인 따위의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사건을 말한다. 옥사가 일어나면 관련자들은 대부분 대역죄로 효수되거나 사약을 받아 죽었고, 가족들은 연좌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원경왕후 민씨는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이자 동지였다. 뛰어난 결단력으로 남편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된다. 1398년 8월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 때 민씨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몸이 불편한 태조 곁에서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자신이 복통이 심하다는 것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동생 민무구·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내어주어 정도전· 남은을 기습할 수 있게 했다. 정도전·남은 등을 죽인 방원은 이성계가 기거하던 청량전으로 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세자빈 심씨, 방번, 경순공주 등도 모두 제거했다. 이 난을 성공하게 도와 준 민무구·무질 형제는 이래서 태종조 초기까지만 해도 최대 공신이자 외척으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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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중인 장기읍성. 장기로 온 유배인들이 맨 처음 들러 배소를 지정받던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태종은 보위에 오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리는가 하면, 자신의 즉위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원경왕후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는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후궁 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둘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른다.

민무구·무질 형제의 옥은 1407년(태종 7) 7월에 발생했다. 이들이 옥사에 연루된 이유는 원경왕후와 태종의 불화도 있었지만, 이들 형제들의 경솔한 입버릇과 방자한 행동들이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원경왕후가 낳은 양녕·효령·충녕·성녕의 4대군 중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했다.

이들의 행동은 1406년(태종 6) 8월에 난데없이 일어난 선위파동(禪位波動)을 불러왔다. 선위라 함은, 군주가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군주의 지위를 물려주는 일을 가리킨다. 보통 같은 왕조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태종은 1404년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 후, 건강상의 이유로 13세의 왕세자에게 선위 표명하고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때 민무구 형제들이 태종이 놓아둔 덫에 걸려들었다. 민씨 형제들은 ‘태종에게는 세자가 있으니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며 다니다가 협유집권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것이다.

이들 형제들의 행동은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해갔다. 이 일로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고 하륜(河崙)은 책임을 지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6일 후 민무구 형제의 처벌을 청하는 이화(李和)의 상소로 이들도 결국 투옥되는 옥(獄)이 벌어지게 된다.

태종은 교서에서 민씨 형제의 죄목을 10가지로 열거했는데 가장 중요한 죄목이 협유집권의 도모였다. 즉, 1402년 왕이 창종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은근히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신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했다는 것 등이었다. 두 형제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 연안(延安)으로 귀양 갔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 민제(閔霽)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들의 공신녹권까지 박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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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이자 현전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이다. 1402년에 이무(李茂), 이회(李<8588>)가 제작했다.

태종은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장인 민제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들의 생명만큼은 보전해줬다. 1408년(태종8) 민제의 병이 위독해지자, 태종은 두 형제를 귀양에서 풀어 부자가 만날 수 있도록 했고, 태종도 직접 장인에게 병문안을 갔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1408년 9월 15일 민제는 노병으로 죽었다. 태종이 슬퍼하고 친히 상가에 찾아가서 치제(致祭)하였으나, 곧 민무구 형제를 체포하여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09년 10월, ‘이무(李茂)의 난언(亂言)’ 사건이 발생한다. 이무가 주위 사람들에게 “근일에 부산하게 민무구 형제의 죄를 청하는데,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 안순(安純) 등의 무리가 붕당을 만들어 매번 민씨 형제의 일을 선동해 죄를 가하려고 하는데, 상감께서 이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섣불리 내뱉은 이 말이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큰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무와 친한 관리들이 대부분 잡혀와 역모죄로 몰려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태종은 이 사건을 빌미로 1410년(태종10) 3월 17일, 민무구 형제도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이를 이무의 옥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1415년(태종15) 세자 양녕대군이 민무구의 동생인 민무휼·무회 형제를 고발했다. 내용은 두 형제의 언행이 불충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불충한 언행이 사실로 밝혀지자, 태종은 1416년(태종16) 이 형제들에도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결국 원경왕후 민씨 집안은 4형제가 참혹하게 죽는 불운한 집안이 되었다. 경솔한 입버릇들이 태종의 무자비하고 의도적인 외척 숙청작업에 빌미를 제공하여 한때 누렸던 영화의 꿈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민씨 집안과 연관되어 피해를 본 이무의 집안은 또 어떠한가. 조선 건국과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방원은 처음에는 쿠데타의 주역들을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봉하여 우대했다. 그런데 이들이 새로운 권력집단을 형성하면서 왕권을 위태롭게 하자 태종은 어떤 방법이로든 공신들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역모로 몰아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이무(李茂)도 그 대상 중 한명이었다.

이무와 이방원은 삽혈동맹(<6B43>血同盟)을 맺은 관계였다. 그런 이무는 1398년(태조 7년)에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정사공신에 오른다. 또 1400년(정종 2)에는 판삼군부사로서 이방원을 도와 2차 왕자의(난방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좌명공신에도 올랐다.

태종이 이무를 죽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중간에 서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무가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 형제와 더불어 어린 세자를 세우려 하였고 그들과 같이 협유집권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분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태종이 그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무는 문무를 겸한 문신이었지만, 누구 편도 아니었다. 여말선초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그는 항상 이긴 자의 편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에 이인임의 무리라고 공격받았으나 회군공신이 되었고, 1392년 5월에 정몽주의 남은 무리로 탄핵받아 파직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의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사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정도전, 남은 등과 좋았는데 중간에 서서 사태를 살피다 승자를 따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무의 이런 어정쩡하고도 승자지향적인 태도는 태종에게 불충으로 비쳤고, 왕권이 제도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 1호로 분류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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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대관’에 수록된 이무의 글씨. 그는 1409년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연관되어 창원으로 유배를 가는 길에
안성군 죽산(竹山)에서 참형을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문관으로 입신했지만, 문무를 겸비해 왜구 격퇴와 대마도 정벌 등을 비롯해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태종은 ‘장차의 반역을 말한 것도 반역을 실제로 행한 것과 같이 처벌해야 한다’는 ‘춘추공양전 금장(今將)의 의리’를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내세웠다. 이로써 공신들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억지(抑止)하고 세자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형성도 미연에 차단하려 했다. 병권을 오래 잡고 있던 이무가 태종에게는 큰 두려움거리였다. 문관으로 입신했으나, 문무를 겸비한 이무는 태조 초부터 죽임을 당한 그 해까지 오랜 기간 동안 병권에 간여하였다. 1396년에는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충성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무가 병권까지 잡고 있으면서 세자의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태종으로 봐서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무를 죽여 없애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태종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409년 5월, 우의정겸 판병조판사(右政丞兼判兵曹判事)을 맡고 있던 이무가 태종에게 보고도하지 않고 병조의 인사에 개입하여 민무질 형제와 친한 이지성(李之誠)의 품계와 관직을 올려 줘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병권에 대해 매우 민감해 하던 태종은 1409년 10월 2일 이무를 불러 이제까지 그가 잘못한 일들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창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10월 5일 사람을 보내 쫓아가 이무가 안성군 죽주(현재의 竹山)에 이르렀을 때 목을 베어 죽였다. 결국 태종은 현직 우의정인 이무의 행동을 모반대역죄로 간주한 것이다.

태종은 이 옥사에 다른 좌명공신과 원종공신 여러 명도 연루시켜 같이 참수(斬首)했다. 조희민·류기·조박·윤목·이빈·강사덕 등이 모두 이무와 같은 무리로 몰려 죽임을 당한 공신들이다. 이들의 가족과 친족들에게도 연좌죄를 적용했다. 이에 따라 1409년 10월 2일 어렵게 목숨을 부지한 이무의 아들들 중 둘째 아들인 이승조(李承祚)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태종이 취한 왕권강화의 희생물인 이무는 뒤에 신원되면서 아들들의 귀양살이도 풀려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이승조는 태천군수, 온성부사, 가선대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남은 생을 마감했다.

민무구 형제와 함께 이무를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간 난언(亂言)은 내용으로 봐서는 모반대역이 아니다. 단지 ‘막되고 잡된 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태종은 이를 빌미로 외척과 많은 공신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첫째는 입놀림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고들 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한번 내뱉은 말은 발 달린 말처럼 퍼져 나가 문제를 일으킨다. 평소 언행만 조심했더라면 이들이 목숨을 잃는 화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너무 높은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경주 최부자집 가훈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인 것 같다.

최부자 집안에서는 왜 진사에 합격하고도 대과를 치르거나 관직을 받지 못하게 했을까. 그것은 정치나 권력자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는 꾸짖음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치고 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왕권도전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색당파에 휩쓸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원한과 재앙을 흩뿌렸다. 사회의 미덕과 가정의 평온도 훼손되기 일쑤였다.

공신의 아들 이승조의 장기현 유배는 이런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떠나갔다. /향토사학자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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