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의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보인다
3. 강상인(姜尙仁)의 옥사(獄事)평온하기만 한 장기고을. 하지만 이 고을 어딘가에는 이원강 처럼 연좌제에 걸린 억울한 유배객들의 한도 어려 있을 것이다.임금이 세종으로 바뀌었다는 바로 그 해, 1418년 12월 초순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길등재를 넘고 휑한 방산천을 따라 내려와 장기현에 도착한 초로(初老)의 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원강(李元綱)이었다. 바로 이조참판이던 이관(李灌)의 숙부이다. 11월 26일 벌어진 강상인(姜尙仁)의 옥사(獄事)에서 이관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이원강은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는데,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이원강이 여기까지 온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세종 즉위년에 피바람 몰아쳤던 그 강상인의 옥사에 대해 짚어봐야 한다.
1418년 8월, 태종은 18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세자인 충녕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하지만 조선 임금 중 가장 정치력이 뛰어났던 태종이 그대로 물러 날리는 만무했다.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정적들이 제거되었으니, 이들의 잔여세력들이 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또 세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아들이다. 그것도 나이 스물두 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공신세력과 외척세력들에 의해 휘둘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임금 자리는 넘겨주지만 자신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병권과 국가적 대사는 직접 챙기겠다고 선언했다. 상왕이란 임금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을 때 물러난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상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셈이었으니, 과연 정치력 9단의 태종다운 처세였다.
그 무렵 중앙무대에는 공신인 강상인과 외척인 심온(沈溫)의 세력들이 버티고 있었다. 강상인은 태종의 최측근 가신(家臣)으로 태종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인물이다. 이후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을 거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선언하기 직전인 7월에 병조참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참판이었지만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병조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으니 의심 많은 태종에게는 은근히 걱정거리였다. 심온은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세종의 장인이었다. 현직 영의정이고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이다. 그를 따르는 육조(六吏曹)의 관리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의 동생 심정(沈泟)은 군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총제(都摠制)이면서 병조참판 강상인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 세력들이 태종에게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태종은 강상인과 심온의 세력들이 제거되어야 앞으로 세종이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온 선생 묘, 수원시 광교역사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심온은 청송 심씨로 세종의 장인이다.태종이 벼르고 있던 참에 두 세력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8년 8월 15일, 강상인과 도총제 심정 등이 궁궐을 수비하는 금위군의 편제를 보고도 없이 바꾸어버린 것이다. 금위군이란 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ㆍ경비하던 친위병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한 개의 편제이던 군대를 둘로 분리하여 태종이 거처하는 수강궁과 세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나누어 수비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당연히 병권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태종에게 보고하여 처리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세종에게만 보고를 하고 태종을 무시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태종이 전날 강상인에게 병조에 근무할 괜찮은 사람 하나를 천거하라고 했더니 보고도 없이 자기의 친동생 강상례(姜尙禮)를 채용하고 병조 사직(司直)이라는 벼슬을 줘버렸다. 사직은 서울의 각 문(門) 가운데 일부의 파수(把守) 책임을 맡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태종이 강상인에게 이 일의 자초지종을 캐묻자 강상인은 세종이 시켜서 한 일이다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왕권을 양위 한다는 뜻을 밝힌 지 보름도 안 되서 벌써 이들이 병권을 좌지우지하는 기류가 감지되자 태종이 진노할 일이었다. 태종은 그동안 믿고 병권까지 맡겼던 강상인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실험으로 그의 충성심을 관찰해보았다. 결국 태종은 강상인은 간사하고 자신을 속이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강상인을 제거해야할 구실만 남아있었다. 이참에 강상인 뿐 만 아니라 왕실의 외척인 심온과 그를 따르는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무리들도 함께 제거할 작정이었다.
태종은 곧바로 관련자들을 불러 보고도 없이 군대의 편제를 제멋대로 바꾼 일에 대해 심문을 했다. 일이 터지자 반대세력이었던 좌의정 박은(朴訔) 등은 정적들을 제거할 기회는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대세력들은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며 강상인을 비롯한 박습 등 병조 관리들을 모두 중죄에 처하라는 탄핵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태종은 어떻게든 이 일에 심온을 끼워 넣어 그를 권력에서 배제시킬 방도도 찾았지만, 이 사건과 심온의 관련성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태종은 관련자들이 원종공신이고 그 동안 자신을 섬긴 노고를 참작해 이번만은 경고차원에서 넘어가려 했다. 하여 강상인과 심정(沈泟), 병조판서 박습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이들을 모두 고향 근처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반대세력들은 이정도 처분으로는 분에 차지 않았다. 형조 판서 김여지(金汝知)·대사헌(大司憲) 허지(許遲)·좌사간(左司諫) 최관(崔關) 등이 연합상소를 올려 더 강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다. 태종은 이에 못 이겨 강상인을 다시 함경남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보내고, 박습과 병조정랑과 좌랑 등도 더 먼 극변으로 이배시켰다. 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해 9월 8일, 영의정 심온이 세종 즉위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 연서역에는 실세인 그를 전별하러 나온 관리와 양반들의 마차가 한양거리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다.
뒤에서 본 심온선생 묘와 사당. 광교 신도시의 아파트 숲이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대비시켜 준다.그 사실을 그해 11월경에야 알게 된 태종은 위기를 느꼈다. 외척에 대한 지지 세력이 크다는 것은 곧 왕권이 약해지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래서 태종은 일찍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죽여 없애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하들 중에는 앞으로 청송 심씨 일가의 세도를 염려하고 진작부터에 차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세력들은 이때도 놓치지 않았다. 평소 강상인과 심정에게 유감을 품고 있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가 태종에게 이들이 오래전부터 “군사는 마땅히 한 곳(세종)에 돌아가야 한다”며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해 왔다고 밀고했다. 격분한 태종은 이들이 병권을 이용해 역모를 모의했다고 몰아붙였다. 경남 사천에 유배 중이던 박습과 함경도 단천에서 관노로 있던 강상인을 압송해와 취조를 했다. 박습은 그런 일이 없노라고 부인했다. 강상인은 열흘 넘게 받은 압슬형(壓膝刑)의 모진 고문 끝에 자백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자백은 자신이 심정, 이관(李灌)과 같이 태종은 병권에서 물러나고 세종에게 모든 왕권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이 바라는 자백은 이것이 아니었다. 외척의 우두머리인 심온과 관련된 진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태종은 강상인에게 또 압슬형을 가했다. 강상인은 고문에 못 이겨 심온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했다는 취지의 자백을 했다.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노하며 “주모자는 심온이다. 모든 역모는 심온에게서 나왔다” 며 외쳤다. 태종은 전 병조판서 박습을 다시 불러내어 더 모진 압슬형의 고문을 가해 강상인의 진술과 같은 취지의 자백도 받아냈다.
이제 태종의 각본대로 모든 그림이 나왔다. 그 각본이란 게 강상인의 옥(獄)을 심온에게까지 연결시켜 심온도 함께 제거하는 것이었다. 1418년 11월 26일, 태종은 백관을 모아 놓고 강상인·박습·심정·이관은 모반대역(謀叛大逆)로 처단하라고 했다. 그때까지 심온은 명나라에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일부 신하들은 심온이 명나라에 있으므로 그와 공범들을 대질시켜 심온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하고 처단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박은은 대질심문 없이 심온을 모반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의금부 관리들은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수레에 강상인을 묶어 사지를 찢어 죽였다. 강상인은 죽기 전 수레 위에서 ‘사실 나는 죄가 없는데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으로 죽는다’며 울부짖었다. 나머지 사람들인 박습·심정·이관 등은 서대문 밖 근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태종은 심온이 명나라에서 수작을 부리고 돌아오지 않거나 아예 도망할 염려가 있으니, 의금부 진무(鎭撫)를 급파하여 압송해 오라고 했다. 심온은 사은사에서 돌아오는 즉시 의주(義州)에서 기다리던 금부진무 이욱(李勖)에게 체포 되었다. 압송 도중인데도 태종은 사람을 보내 수원(水原)에서 만난 그에게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죽기 전 심온은 금부진무에게 ‘명나라에 들어 간 뒤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태종을 한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청을 하였으나, 태종은 사람을 시켜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누구와 대면하겠다는 말인가’라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이게 강상인 옥사의 전말이다. 강상인의 옥사는 병권을 남용한 그의 개인적인 과오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태종의 병권에 대한 집념 및 외척 경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심온의 신도비각. 9세손 심단(沈檀, 1645∼1730)이 쓴 ‘안효공온신도비명(安孝公溫神道碑銘)’에는 심온이 세상을 떠나기 전 후손에게 자손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吾子孫 世世 勿與朴氏相婚也)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기재잡기(寄齋雜記)’ 등 야사(野史)에는 심온이 사약을 받으면서 원수지간이 된 박은을 원망하며 자자손손 박씨들과는 혼인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심온의 신도비명에도 이러한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청송 심씨와 박씨가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가승(家乘)은 이래서 생긴 일이다.
의금부 제조(提調) 유정현(柳廷顯) 등은 심온의 아내 안씨 또한 천안으로 유배를 보내 종으로 삼기를 청했다. 결국 안씨는 의금부의 여종이 됐다. 이들은 심온의 딸인 왕비 소헌왕후 심씨도 죄인의 여식이므로 폐위해야 한다고 주청을 했다. 그러나 세종이 극구 나서서 말렸다. 태종은 소헌왕후가 많은 자손을 낳았고, 세종과 금슬이 좋다는 이유를 들어 폐출은 시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외척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문종은 심온의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편, 이 옥사에서 참형을 당한 이관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충청도경차관, 사헌부집의,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아버지는 고려와 조선 초기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원굉(李元紘)이다. 이 사건으로 이관의 아들 이소인(李紹仁)은 울산(蔚山)으로, 형 이약(李鑰)은 통천(通川)으로 유배를 가 모두 관노가 되었다. 이관의 숙부 이원즙(李元緝)은 평해(平海)로, 조카 이말한(李末漢)은 거제(巨濟)로, 이백장(李伯長)은 장흥(長興)으로 귀양 갔다. 이때 숙부 이원강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것인데, 모두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연좌제(緣坐制)의 족쇄에 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을 빌려 와 사용했다. 이 법은 ‘모반대역죄’를 아주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대역죄를 지은 본인은 능지처참하고 그의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목을 매달아 죽인다. 그의 16세 이하의 아들과 어머니·처와 첩·할아버지와 손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와 첩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으로 삼는다. 또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며, 백숙부와 조카는 동거여부를 불문하고 유 3천리 안치형(安置刑)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다행히 강상인의 옥사에서는 태종도 도리에 어긋남을 알았음인지 관련자들의 아들들의 목숨만은 부지하게 배려를 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일단 모반대역죄가 발생하면 연좌제에 걸린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단종복위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시애사건의 경우는 연좌된 사람이 300여 명에 이른다. 길고도 가혹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연좌법은 갑오개혁 때인 1894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
강상인의 옥사에 연좌되어 피해를 본 인천이씨 집안은 청송심씨 집안보다는 먼저인 1459년(세조 5), 이관의 손자 이우(李祐)의 상소로 신원이 되어 자손들도 관직에 출사 할 수 있게 되었다.
역모자의 숙부라는 혈연의 족쇄를 차고, 왕권강화와 외척척결이라는 운명적 이유로 장기까지 온 이원강은 주거마저도 제한 된 ‘안치(安置)’였다. 그의 억울한 유배살이는 두고두고 장기 땅에 한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향토사학자
출처 : 경북매일(
http://www.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