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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북매일 - 시인 이병철의 경북 바닷길 537km, 그 맛과 멋 - (6) 야경과 불꽃과 아귀찜이 있는 포항의 밤은 …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19-08-06

기사링크 :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22061


⑥ 여름 포항, 그 낭만에 대하여
12폭포가 숨어 있는 내연산 절경 즐긴 후
옻닭백숙 숨은 맛집서 미식의 열망 채워
밤바다를 누비는 크루즈 유람선 바라본
포스코의 야경에 황홀한 불꽃쇼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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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국제불빛축제.

‘포항’이라고 발음하면 군대에서 덮고 자던 모‘포’가 떠오르고, 어린 시절 마당 장독대에서 햇살과 잠자리와 배추흰나비를 불러 모으던 ‘항’아리가 생각나 이내 따뜻해진다.
포항은 내게 따스한 항구 도시, 매년 겨울마다 몸과 마음을 쉬러 즐겨 찾는 여행지다. 주로 겨울 바다의 진객인 볼락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12월부터 2월까지는 왕복 750㎞의 장거리 운전도 마다않고 거의 매주 드나들 정도다.

겨울 포항에 오면 늘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인다. 새벽에 도착해 방파제에서 낚시하다 동해가 쏘아올린 황홀한 해돋이를 감상한다.
볼락을 꽤 잡았으니 구룡포에서 모리국수로 속을 얼큰하게 채우거나 죽도시장 장기식당에 가 소머리곰탕을 먹는다.
낮 동안엔 영일대 해수욕장의 볕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쩡쩡 얼어붙은 오어사 계곡 구경을 가거나 구룡포에 있는 호미곶온천랜드에서 낮잠을 잔다.
때로는 ‘철규분식’ 찐빵이나 죽도시장 호떡 군것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해거름에 다시 낚시를 하고, 밤엔 볼락 뼈회와 매운탕, 시장에서 산 대게 몇 마리 곁들여 만찬을 즐기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겨울 아닌 계절에 포항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덕 강구항에서 출발해 장사항을 지나 포항 화진해수욕장에 접어드니 공기 빛깔부터 다른 여름 포항이 생경했다.
제철 농어의 은빛 지느러미 같은 아침 햇살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모공에 푸른 물이 들었다.
항구의 낮은 지붕들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초록을 보며 나는 저 무성한 신록이 내연산의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여름 포항의 첫 방문지는 내연산으로 정했다. 거기 보경사(寶鏡寺)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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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보경사 계곡 상생폭포.

보경사는 내연산의 관문이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지명이 창건했다.
지명이 중국 진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느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받았는데, 그걸 이곳 내연산 연못에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웠다는 연기설화가 있다.
사방이 맑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여름 아침, 보경사 일주문으로 들어서면서 복잡하고 괴로운 속세와 잠시 이별할 때 연기설화가 하나의 은유로 다가왔다.
거울은 곧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감정, 욕망들을 묻어버리는 순간 내면에서부터 평온함이 돋아난다.
외연(外延)이 아닌 내연(內延)의 세계로 향해 가는 걸음을 다람쥐와 청설모, 오색딱따구리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규모가 큰 보경사 경내, 단아하고 정갈하게 배치된 가람들 사이를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동안 볼락 잡는다고 포항에 와 얼마나 많은 살생을 저질렀던가? 범종각에 걸린 커다란 목어(木魚)를 보며 속이 뜨끔했다.
두 손을 모아 참회하고 볼락들의 극락왕생과 윤회를 빌었다. 5m 높이의 보경사 오층석탑 앞에서 그 웅장함에 또 한 번 기가 죽는다.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탑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향해 약간 들려 있는데, 겸허히 그러나 확고하게 지상 위의 천상을 소망하는 모양새다.
돌 모서리마다 햇살이 투명한 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시 경내를 산책하다가 이번엔 유명한 두 그루의 탱자나무와 만났다.
한 그루는 사찰 동쪽 흙돌담 앞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서쪽 빈터에 서 있다. 서쪽에 있는 것은 수령이 400년 넘은 고목이다.
탱자나무가 굽이굽이 뻗어 오르며, 마치 고흐의 ‘사이프러스’처럼 무성한 초록 불꽃을 공중으로 댕겨 놓는 오전 아홉시,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만났다.
더위가 벌써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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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동 ‘부산아구찜’ 아귀간수육.

더위를 피해 내연산의 서늘한 품속을 파고들어 본다. 청하골, 내연골, 연산골로 불리는 보경사 계곡이 땀을 식혀준다.
내연산에는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 폭포들은 모두 제 모습을 스스로 먼저 내보이는 일이 없다.
깊은 숲길을 헤치고 찾아온 방문객에게만 앞섶을 풀어 빛나는 살결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우레 같은 물소리가 들리는데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물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숨어사는 건 내 취미, 시원한 알몸 다 내놓고 나는 외로움을 노래처럼 불러. 언뜻 네 눈길이 나를 한번 붙잡았을 뿐,
나는 여기 왔다 간 적도 없어 내가 거기 있더라고 말하지 마, 그 순간 내 몸은 사라지고, 나는 햇빛 속에서 하얗게 타오르지”(이경교, ‘숨은 폭포’)라고.
귀가 먼저 달려간 저기 계곡 상류, 나란히 떨어져 내리는 두 물줄기가 보인다. 상생폭포다.
두 갈래 물이 몸을 합치는 폭포 아래 소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만 물빛, 쳐다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옛날에 어느 기생과 선비가 서로 사랑했는데, 이룰 수 없는 연을 비관하여 절벽에서 함께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상생폭포 위 절벽을 기화대(妓花臺), 물이 받치는 소를 기화담(妓花潭)이라고 부르는 연유를 알았다.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천양희, ‘직소포에 들다’)다.
물소리를 쫓아 마음이 환해진 나는 목욕하는 선녀를 훔쳐보던 나뭇꾼처럼 보현폭포와 삼보폭포의 살빛을 겨우 엿볼 뿐이다.
두 ‘숨은 폭포’를 지나 소금강 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포항 바다가, 가까이는 기암절벽 위에 놓인 누각 선일대(仙逸臺)가 보인다.
골짜기가 멀리까지 손을 뻗어 바닷바람을 잡아당겼다. 등줄기에는 더운 땀이 흐르지만 마음에는 차고 맑은 이슬이 맺혔으니, 이만하면 됐다. 산을 내려가도 좋다.

두 시간 남짓 산행에 꽤 지쳤다. 복날이 가까워선지 보양식에 구미가 당긴다.
하산길에 닭고기와 막걸리 생각부터 하는 나 같은 얼치기 등산객은 기를 쓰고 산에 가도 다이어트는커녕 살이 포동포동 오른다.
흥해읍 달전리의 ‘달전식당’은 내연산의 아담한 폭포처럼 ‘숨은’ 맛집이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소개된 적 없어 아는 사람만 아는 집, 단골 장사만 해도 충분하다.
꽃나무를 가꾼 마당의 화사함이 내 허기에도 꽃물을 들인다. 단순한 배고픔이 미식에의 열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마루 아래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면 한옥의 고즈넉함이 고단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주무른다.
퍼질러져 낮잠이나 자고 싶지만, 목은 이색의 후손이므로 체통을 지켰다. 잠시 후, 미리 주문해둔 옻닭백숙이 상에 올랐다.
밑반찬 담음새에 먼저 감탄할 수밖에. 초승달 모양 그릇에 담긴 장아찌와 김치를 바라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푹 삶은 옻닭 위에 부추를 수북하게 얹은 백숙을 한 입 뜯어 먹을 때마다 팔뚝과 종아리에 바로 근육이 붙는 느낌이 들었는데,
걷어붙인 셔츠 소매 단추가 터졌으니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석한 음식평론가 황광해 선생께서는 이 집 김치 맛에 반해 백숙이 다 사라진 후에도 김치를 향한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여름 입가심엔 역시 아이스커피가 제일이다. 칠포와 월포 바다 사이에는 젊은 여행객들에게 소문난 카페가 있다.
흥해읍 오도리의 ‘오도리오도시’는 그리스 산토리니의 타르베나(그리스 전통 레스토랑)를 연상시킨다.
하얀 외벽에 커다란 통유리가 눈길을 끄는 이곳 카페의 매력은 2층 루프탑에서 눈앞에 펼쳐진 흥해 바다를 보며 마시는 아이스커피 한 잔의 여유에 있다.
오도리오도시에서는 아이스커피를 머그잔이나 종이컵이 아닌 투명 페트 용기에 담아 캔 뚜껑으로 밀봉해 제공한다.
캔 뚜껑 손잡이를 따는 순간 톡, 하는 청량감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얼음을 이리저리 굴리며 커피를 마시는데, 곁에선 연인들의 사진 찍기 놀이가 한창이다.
동해안의 핫플레이스 카페들은 모두 젊은 연인들을 불러 모으지만 이곳이 특히 유명하다고 들었다.
보아하니 남녀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수평선에 나란히 꽁꽁 묶여 ‘운명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망 좋은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반쯤 마신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자마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커플이 부리나케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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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차림새가 보기 좋은 달전식당 옻닭백숙 한 상.

죽도시장에 들러 멸치와 디포리, 미역을 엄마 집에 택배 부치고, 호떡 한 개 집어 먹으니 어느덧 해질녘이 가깝다.
영일대 선착장으로 갔다. 영일만 크루즈는 평일에는 낮 2시에만 운항하지만 토요일에는 저녁 7시30분, ‘야경 불꽃 음악 크루즈’라는 프로그램으로 야간 운항을 하고 있다.
90분 동안 크루즈 유람선을 타고 포항시의 야경과 함께 화려한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어 연인, 가족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미리 예매한 승선권을 제시하고 크루즈에 올랐다. 저기 포스코의 불빛들이 영일만 물결 위에 춤을 추는 동안 여름밤의 바닷바람은 재즈 음악처럼 온몸을 나른하게 했다.
잠시 후 영일만 크루즈의 하이라이트인 불꽃 쇼가 펼쳐졌다. 펑펑, 폭음과 함께 커다란 불꽃들이 포항 밤하늘에 활짝 피었다.
부풀어 오른 달은 불꽃과 바다 사이에 육중한 몸을 끼워 넣고, 어둠마다 빛이 날아가 박혀 눈부신 야경을 이루는 저녁,
나는 화려한 불빛과 차분한 물빛이 음악 속에 반짝이는 포항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런데 크루즈 위에서 내 마음은 엉뚱하게도 물회와 아귀찜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저녁 메뉴 고르는 것만큼 어려운 결정도 없다.
갈피를 못 잡는 나를 음식평론가 황광해 선생께서 당신이 직접 검증한 ‘착한 식당’으로 이끌었다.
죽도동의 ‘부산아구찜’은 싱싱한 생아귀만 사용하는데, 양념이 과하지 않고 맛을 내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해산물과 야채만 곁들여 맛이 깔끔하다.
아귀찜과 아귀간수육을 주문했다.
아귀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황광해 선생께서 예찬한 물김치를 한 술 떠먹으니 시원하고 아삭아삭한 새콤달콤함이 입 안에 폭포를 열어젖혔다.
침샘이 활짝 열려 온몸이 음식 맞을 준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아귀찜과 아귀간수육이 상에 올랐다.
아귀 살 한 점에 영일만 바다가 혀끝에서 파도치고, 아귀 간 한 점에 오색 불꽃이 입 안에 팡팡 터지는 행복,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노래 제목을 빌리지 않더라도 포항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야경과 불꽃과 아귀찜으로 여름 포항의 낭만은 완성된다.
밤늦도록 창밖 글썽이는 불빛을 보며 나는 스스로 밤이 되고 바다가 되다가, 영일만이 머리맡에 띄워 보내는 파도를 베고 누워 소라고둥처럼 적막한 잠에 들었다.
잠들기 전, 여름 포항에 자주 오게 되리라는 예감이 발끝에서부터 쇄골까지 부드러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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