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병철의 경북 바닷길 537km, 그 맛과 멋
⑤ 저 파란 수평선 너머엔 행복한 날들이▲일곱 개의 보물이 가득한 칠보산 자연휴양림.파도가 새벽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꿈속 세상이 아늑했다.
요란한 스마트폰 알람시계 대신 바다를 가르는 뱃고동이 압력밥솥 소리를 내며 귓가를 두드렸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서 흰쌀밥 냄새가 부풀어 오를 때, 나는 빛과 소리와 냄새로 오는 영덕의 아침을 끌어안으려 기지개를 켰다.
일곱가지 보물 가득한 칠보산 정기 품은 영해는 ‘인재의 산실’
옥계계곡 차고 맑은 물은 오십천으로, 다시 강구 바다로 흘러…
옛것과 새것, 한식과 양식, 바다와 내륙이 함께하는 교통오지는
다채로운 매력 뽐내는 ‘동해안 관광 중심지’로 새로운 변신 중
어제는 영덕 바다의 푸른색에 흠뻑 물들었으니 오늘은 내륙으로 가봐야겠다.
누구나 바다부터 떠올리지만, 영덕에는 바다 못지않게 아름다운 산과 계곡, 하천이 있다.
먼저 더덕, 황기, 산삼, 멧돼지, 철, 구리, 돌이끼 등 일곱 가지 보물이 가득하다는 칠보산(七寶山)에 올랐다.
금강송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에 숨 쉴 때마다 도시의 미세먼지와 술과 한숨과 세월에 찌든 몸속 때가 깨끗이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무성한 나뭇잎을 비집고 쏟아지는 초록 햇빛이 이마에 닿는 순간,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광합성을 시작했다.
숲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숲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무가 된다는 사실을.
태백산맥 끝자락의 칠보산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삼성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04년 이곳 칠보산에 개인 명의의 수목원을 조성하려 부지를 매입했는데,
수목원 대신 삼성전자 연수원이 들어섰다. 칠보산에 동식물과 광물이 풍부한 것은 땅의 기운이 좋기 때문이다.
좋은 땅에선 좋은 사람이 나는 법, 칠보산이 있는 영덕 병곡면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내 마을 전체가 세금 면제 혜택을 받았다는 풍문도 있다.
▲하벳 풀빌라 앤 리조트의 수려한 외관금강송 사이로 동해의 장엄한 일출을 볼 수 있는 칠보산자연휴양림,
소나무들이 투명한 스프레이를 들고 촉촉한 솔향을 뿜어대는 자연의 미스트에 얼굴은 물론이고 마음의 피부까지 싱그러운 탄력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피부가 좋다. 금강송 껍질은 반들반들하고 바위는 반질반질하며 흙은 만질만질하다.
신발을 벗고 가벼운 맨발로 숲길을 걸었다.
걷다보면 저기 고래불 명사이십리 해안이 나타나고, 유난히 낮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태백능선의 장관과 마주하게 된다.
이 숲에서 하루 묵으면 얼마나 좋을까?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새 소리와 이슬과 벌레와 사이좋게 누워 잠들면 땅의 좋은 기운을 받아 몸도 영혼도 다 건강해질 텐데.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숲을 나섰다.
숲에서 나오자마자 숲의 상쾌함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이번엔 맑은 물을 찾아 다른 숲에 들었다.
달산면 옥계계곡은 팔각산 천연림과 동대산 기암절벽이 함께 빚어낸 깊은 협곡이다.
손때 묻지 않은 바위들 사이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물이 수십억 개 구슬이 되어 굴러 내린다.
절벽에 움푹 파인 바위굴들마다 신비한 옛 이야기를 숨겨두고 있을 것만 같은 계곡, 에메랄드빛 물에 발을 담그니 발가락이 얼얼했다.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고드름이 열리는 듯한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원도 양구의 파서탕(破暑湯)이 더위를 깨뜨린다는데,
옥계계곡도 파서탕 못지않은 자연의 냉장고, 너른 자갈밭과 소나무 그늘이 있어 여름 피서지로 더할 나위 없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라고, 함께 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혼자라도 꼭 다시 오라고, 그때 마음의 신열을 서늘하게 내려앉혀 주겠다고 물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베르데’의 대게 로제 파스타.옥계계곡은 오십천으로 흐르고, 오십천은 다시 강구 바다로 흐른다. 낚시꾼인 내 마음은 강과 바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한다.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바닷물과 섞이는 곳을 기수역이라고 하는데, 영덕 오십천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수역 하천이다.
영덕은 바다낚시의 고장이지만, 오십천에서 즐기는 민물낚시는 낚시꾼에게 뜻밖의 손맛을 안겨준다.
바닷고기인 농어를 민물에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농어는 가을과 겨울 사이 기수역에 와서 산란을 하고, 부화한 치어는 점차 성장해 바다로 나간다.
기수역 농어는 루어낚시로 잡는다. 일반 농어 루어낚시보다 조금 가볍게 장비를 쓰는데, 바다낚시 못지않은 짜릿한 손맛을 만끽할 수 있다.
5월부터 농어 시즌이 되면 오십천에선 웨이더(방수복)를 입고 허리까지 잠기는 물에 들어가 부지런히 채비를 던지는 루어낚시꾼들을 볼 수 있다.
농어를 민물에서 만나는 것도 신기한데, 더 놀라운 것은 오십천에 민물고기의 제왕 쏘가리가 산다는 사실이다.
농어 루어 채비에 씨알 굵은 쏘가리가 걸려들어 금빛 표범무늬를 번쩍이며 끌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 쏘가리는 기수역에 살지 않는 어종이지만 치어 방류 사업으로 오십천에 자생하게 된 것이다.
농어와 쏘가리 외에도 오십천에선 민물고기인 꺽지, 붕어, 잉어, 바닷고기인 숭어, 황어, 감성돔, 심지어 우럭까지 낚시로 잡을 수 있다.
참, 은어를 빼놓았다.
오십천은 호남의 섬진강과 함께 우리나라 은어낚시의 양대 메카, 2009년에는 33.5㎝의 대물 은어가 잡혀 은어낚시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루어낚싯대를 꺼내 한 시간 정도 낚시를 해봤지만 잔입질 몇 번 받은 게 고작이었다.
기수역에서 바다로 가는 농어처럼 나도 낚시를 접고 강구항으로 향했다.
물고기 입질이 없으니 사람 입질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강구항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대게빵을 집어 들었다.
강구항에서는 ‘울진대게빵’과 ‘영덕대게빵’이 또 각축을 벌인다.
울진대게빵은 게살을 갈아 넣은 빵에 호두, 블루베리, 슈크림 등 세 종류의 속을 골라 채워 먹을 수 있다.
대게 등딱지에 담아 파는 대게머핀도 별미다.
한편 영덕대게빵은 울진대게빵에 비해 작고 앙증맞다.
찰보리 반죽에 게살과 함께 껍질까지 갈아 넣어 게맛이 조금 더 강하다.
하여간 눈도 즐겁고 입도 즐거운 대게빵을 먹을 만큼 사서는 갈매기들이 내 빵을 노리는 위험한 항구를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강구항의 명물, 대게빵.해파랑공원에 앉아 점점 붉게 익어가는 태양을 보며 대게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빵에서도 태양에서도 고소한 게 냄새가 났다. 먹음직스러운지 눈길을 떼지 못하는 꼬마에게 빵 한 개를 건넸다. 일요일의 공원은 붐볐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개의 눈이 일제히 향한 곳엔 제 어깨 너머 무엇이 있는지 말해줄 듯 말해주지 않는 수평선이 고요한 입술을 옴짝달싹할 뿐이었다.
강구항은 1997년 방영된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 주제곡인 루 크리스티의 ‘Beyond the blue horizon’은 저 수평선 너머에 희망이 넘실거린다고 노래한다.
“파란 수평선 너머엔 행복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어. 괴로웠던 날들은 이제 안녕.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라고.
바다에서는 비관주의자가 낙관주의자로, 염세주의자가 긍정주의자로 바뀐다.
거친 격랑이 일고 비바람 세게 몰아치는 삶의 바다를 벗어나 잔잔하고 부드러운 바다 앞에 선 사람들,
수평선 너머 내일에는 그들이 찾는 행복과 희망, 꿈과 사랑이 반드시,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빵배와 밥배는 따로 있다. 배꼽시계가 저녁을 알렸다.
영덕의 먹거리라면 대게와 회, 물회, 곰치국, 물메기탕 등 수산물을 재료로 한 한식이 먼저 떠오른다.
북적거리는 항구, 항구를 조금 벗어나면 한적한 어촌마을, 항구의 어시장과 대게 식당, 어촌마을의 허름한 횟집….
영덕을 찾는 사람들 누구나 그런 곳에 앉아 바다 위에 뜬 달을 보며, 은하수처럼 늘어선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며 저녁 먹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게 좀 식상하게 느껴져 뭔가 색다른 식사를 경험하고 싶었는데, 병곡면 해안도로가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로 차를 몰았다.
레스토랑 ‘베르데’는 ‘하벳 풀빌라 앤 리조트’ 내에 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내부와 통유리창으로 시원하게 보이는 오션뷰가 인상적이다.
수준급 요리사들이 울진 후포항과 영덕 축산항, 영해 만세시장 등에서 공수해온 지역의 식재료로 다양한 이탈리아 요리를 만든다.
영덕 대게 파스타 등 동해의 수산물을 이용한 메뉴들은 물론 한우 스테이크, 콰트로 치즈 피자, 시저 샐러드 등과 함께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대표 메뉴인 대게 로제 파스타를 주문했다. 대게살을 듬뿍 발라 넣은 파스타를 한 입 먹을 때마다 면에 들러붙은 게살이 입안에 가득 씨ㅂ혔다.
파스타와 함께 시원한 스파클링 와인을 곁들이며 통유리창 너머 어둠 내린 바다를 보는 저녁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베르데에서 나는 영덕의 변화를 실감했다. 교통 오지였던 어촌이 이제는 동해안 관광의 중심지가 됐다.
어시장 난전의 뽕짝부터 고급 레스토랑의 재즈 뮤직이 공존하는 영덕은 옛것과 새것, 한식과 양식, 바다와 내륙이 함께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는 고장으로 변모 중인 것이다.
▲강구항의 밤 풍경.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니 하벳 풀빌라 앤 리조트가 캄캄한 밤바다 위에 화려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외관, 알고 보니 이집트에서 공수해온 돌을 하나하나 조각하여 쌓아올렸다고 한다.
이 럭셔리 풀빌라의 각 객실은 고래불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스파와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젊은 세대는 물론 가족 관광객들에게도 동해안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의 명소로 각광 받는 중이다.
가장 저렴한 방이 1박에 38만원, 비싼 방은 89만원이다.
홀로 외로운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시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라서 나는 하릴없이 리조트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하며
이곳 스위트룸에서 함께 호캉스를 즐기고 싶은 이의 얼굴이나 그려보았다.
고래불 해수욕장의 한 모텔, 시골 여관에서 씻고서 시골 밤거리를 홀로 걸으면 마음이 습해진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으로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당신과 나 사이는 지구에서 토성까지 만큼이라서 가까워지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 고정된 이별의 거리,
이곳과 그곳의 시차는 영원히 그대로다.
그러나 하얗게 밀려왔다가 아득히 검게 밀려가는 밤바다 뒤에서 내일의 태양은 벌써 떠오르고,